I. 서론
이번 시즌은 지휘봉을 내려놓는 감독들이 유독 많다고 느낀다. 프라이부르크에 29년간 헌신한 슈트라이히가 축구계를 은퇴했고, 오랜 기간 리버풀을 이끌며 수렁에 빠진 클럽을 구해내며 리버풀의 전설이 된 위르겐 클롭도 리버풀 감독직을 내려놓았다. 챠비 에르난데스와 토마스 투헬은 경질과 번복을 거듭하다 결국 시즌이 종료된 후 모두 팀을 떠나기로 했고 2010년대 유벤투스의 전성기를 이끈 마시밀리아노 알레그리 역시 코파 이탈리아 결승에서 퇴장당하며 경질당했다.
여기에 다섯 시즌 동안 AC밀란을 이끌며 2021-22 시즌 스쿠데토를 차지하는 데 공을 세운 스테파노 피올리가 AC밀란을 떠난다는 소식이 기정사실화가 되었다. 혹자는 피올리를 형편없는 감독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한다. 다만 피올리가 이런 평가를 받기에는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한다. AC밀란 역사 속 피올리는 분명 과보다 공이 더 많기 때문이다. 오늘 이 글에서는 그가 이전까지 걸어온 길과 AC밀란을 이끈 피올리의 행보에 대해 이야기를 하겠다.
II. AC밀란 부임 전
스테파노 피올리. 그는 과거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땜빵, 소방수 감독이었다. 보통 세리에 A에서 중위권을 차지하던 팀들이 매번 성적 부진을 이유로 전임 감독을 경질하면 소방수로 피올리를 항상 선임하였다. 피올리가 이전까지 걸어온 커리어는 단기간에 성적을 내는 데 있어서 나름 준수했다. 하지만 장기간 팀을 운영하면 늘 경질이나 자진 사임으로 끝마쳤다.
피올리는 AC밀란 부임 전 가장 오랫동안 맡은 팀이 3년 동안 맡았던 볼로냐였을 정도로 감독 데뷔 이후로 한 시즌을 버티지 못하고 경질로 마무리하는 경우가 잦았다. 가장 오래 버틴 볼로냐에서도 마지막 시즌은 경질로 끝났다. 이후 라치오와 인테르, 피오렌티나를 맡았지만 역시 좋지 않은 결과로 감독직을 놓게 된다.
III. AC밀란 부임
2019-20 시즌 AC 밀란 감독이었던 지암파올로가 최악의 경기력을 연일 보이며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 결국 구단은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던 지암파올로에게 AC밀란 역사상 최단기간 경질이라는 불명예를 선사했다.
지암파올로를 경질하며 칼을 빼든 AC밀란은 반등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들은 피올리를 후임 감독으로 선택했다. 대다수의 밀란 팬들은 피올리가 단순히 소방수로 왔다고 생각했었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 선택이 AC밀란의 역사를 송두리째 바꾼다고 생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3.1 스스로 성장한 19-20 시즌]
피올리 부임 후에도 성적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특히 아탈란타를 상대로 0-5으로 대패한 경기는 AC밀란 팬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지암파올로 시절 경기력과 성적보다 더 좋지 않은 결과를 기록한 피올리는 아직까지 소방수에 만족할 만한 모습은 아니었다.
그래도 팀의 마지막 스타플레이어였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가 8년 만에 밀란으로 복귀하며 좋지 않던 팀의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한 초석을 다져가기 시작한다.
아직은 역부족인지 데르비 델라 마돈니나에서 2-0으로 앞서갔지만 4골을 연달아 내주며 패배한다. 전반전에는 충분히 잘 준비해 왔으나 경기 종료 10여 분을 남기고 단 1장의 교체 카드도 쓰지 않은 것과 전술의 변화 없이 후반전을 시작한 것이 패배의 요인으로 지적받았다.
이렇듯 좋지 않은 상황에 놓였던 피올리는 설상가상 랄프 랑닉이 AC 밀란 감독에 부임할 것이라는 루머까지 돌았다. 이대로 간다면 피올리는 이전처럼 소방수 역할만 하다 감독직을 내려와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
그러나 풍전등화같던 피올리의 감독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계기가 생겼으니 바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리그가 중단됐던 것이다. 일단 피올리는 이 시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해 자신과 팀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공격과 수비 모두 가담하던 케시에를 수비만 하도록 역할을 제한했고, 찰하놀루에게 프리롤 역할을 부여한다. 또한 자신의 전술에도 변화를 준 피올리는 AC밀란이라는 팀을 세계에서 가장 공격적인 팀으로 만든다.
피올리가 AC밀란과 재계약할 수 있었던 조건은 챔피언스리그 진출이었다. 자신의 후임자로 랑닉이 올뻔한 상황 속에서 스스로 팀과 자신에게 변화를 주며, 시즌 말에 재계약을 하게 된다. 피올리는 재계약에 부응하듯 코로나 휴식기 이후로 패배 없이 시즌을 끝낸다. 하지만 6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FFP 위반으로 UEFA는 유로파리그 진출권을 박탈한다.
[3.2 부활의 신호를 보인 20-21 시즌을 거쳐 완벽하게 부활한 21-22 시즌]
유로파리그 진출권 박탈로 실망할 AC밀란이 아니었다. 오히려 밀란은 더욱 단단해지기 시작한다. 여름 이적시장에서 초특급 유망주였던 산드로 토날리를 영입하는 등 밀란 보드진은 피올리에게 적극적인 지원을 한다. 이에 보답하듯 피올리는 2020-21 시즌 개막 후에도 24경기 무패 행진을 달리게 된다. 이렇게 밀란은 전반기 1위를 달성했고, 밀란 팬들은 잠시나마 10년 만에 스쿠데토라는 꿈을 꾼다.
하지만 코로나 확진으로 결장하는 선수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부상으로 주전들이 대거 빠지면서 상승세가 꺾였다. 결국 라이벌 인테르에게 우승을 내주었지만 이들에겐 아직 챔피언스리그 경쟁이 남았었다. 결국 AC밀란은 마지막 라운드에서 아탈란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리그 2위로 8년 만에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하는 경사를 누렸다.
길었던 암흑기를 겪은 AC밀란은 꿈에 그리던 챔피언스 리그 복귀라는 광명을 되찾았다. 비록 조별리그에서 탈락했지만, 오히려 AC밀란은 리그에 집중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피올리의 전술에 맞는 선수를 영입하고 어린 선수들이 성장하면서 우승 경쟁까지 하는 팀으로 바뀐다. 이전 시즌에는 꿈만 꾸던 스쿠데토를 달성하게 되며, 11년만에 세리에 A 우승을 거둔다.
밀란이 스쿠데토를 다시 차지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즐라탄을 기점으로 키예르, 지루, 플로렌치와 같은 고참 선수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어린 선수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었고, 이들 덕분에 선수단은 하나로 뭉치게 된다. 선수들을 믿고 끝까지 함께하며 덕장의 면모를 갖춘 피올리와 팀의 디렉터이자 팀 내 역사상 최고의 선수였던 파올로 말디니의 영향력까지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며 이뤄낸 우승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피올리는 세리에 A 최고 감독상을 받는다. 부상이 많은 시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롯이 피올리 본인의 역량으로 AC밀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소방수로 시작해 아무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피올리였지만 몰락한 명가인 AC밀란을 암흑기에서 완전히 부활시킨 명감독으로 다시 탄생한 순간이었다.
[3.3 오랜만에 복귀한 챔피언스리그 토너먼트, 그리고 내리막]
22-23 시즌에는, 디펜딩 챔피언의 위용은 사라지고 경기력이 좋지 않아 리그는 4위로 아쉬운 성적을 거뒀지만,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오랜만에 유럽 강호 명성을 다시 되찾았던 시즌이었다. 마지막 우승 시즌인 06-07 시즌 이후로 처음 4강에 올라가는 쾌거를 달성했기에 이 또한 AC밀란이 다시 옛 명성에 맞는 성적에 한 걸음 더 나아갔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대진운이 좋아 준결승에 진출했다고 하지만 첼시가 폼이 좋지 않았어도 불과 2년 전에 우승을 이뤄냈을 정도로 경험이 많았고 잘츠부르크와 디나모 자그레브 역시 전력은 약하지만 최근 UEFA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단골손님이라 경험 자체는 AC 밀란보다 많았다. 16강에서 만난 토트넘은 케인과 손흥민이라는 정상급 공격 듀오가 있었으며 8강 나폴리는 해당 시즌 세리에 A에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였고 챔피언스리그에서도 리버풀과 프랑크푸르트를 완파한 강팀이었지만 그런 나폴리를 꺾고 준결승에 진출했다. 비록 인테르에게 패했지만 밀란 입장에선 큰 성공을 거둔 것이다.
문제는 시즌 종료 후에 나왔다. 팀 내 정신적 지주인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가 은퇴했고, 시즌 초 신임 구단주이자 레드버드 캐피탈을 운영하는 게리 카디널이 AC밀란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으며 실제로 리그 우승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큰 공을 세운 파올로 말디니를 경질시키며 선수단과 팬들에게 큰 충격을 주더니 핵심 선수 산드로 토날리까지 뉴캐슬로 판매하며 팬들의 성난 민심에 기름을 부었다.
지난 시즌 스쿼드 내 선수들 몇몇이 이탈하자 레인더스, 로프터스치크, 풀리식 등을 영입하며 스쿼드를 두껍게 했다. 하지만 지난 시즌에 이어서 좋지 않은 경기력으로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에서 3위를 기록하며 조별리그에서 탈락해 유로파리그로 밀려났고 유로파리그에서 우승 후보로 뽑혔지만 예상과 달리 8강에서 한수 아래라고 평가받던 AS 로마한테 탈락을 했고, 리그 역시 준우승으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말이 준우승이지 우승팀 인테르 밀란과 37라운드 기준 승점 차이가 19점까지 벌어졌다. 이에 책임을 진 피올리는 시즌이 끝난 뒤 팀을 떠나기로 합의했다.
IV. 피올리에게는 어떤 가치가 있을까?
피올리는 자신의 철학이 강한 전략가보다는 선수들을 잘 품는 덕장 유형의 지휘관이다. 그리고 선수 육성에도 일가견이 있어 유망한 선수들을 보는 눈과 이들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AC 밀란 부임 이후 피올리는 자신의 능력까지 한층 더 끌어올리며, 감독으로서 한 단계 더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급한 불을 꺼야 하는 팀에 어울리는 소방수였다. 큰 요구사항 없이 있는 자원으로 팀을 이끌어왔다. 하지만 그것이 오래가진 않았으며, 장기적으로 전술적인 부분에서 큰 약점을 보였기 때문에 단순히 소방수 감독으로 있었던 것이다. 설상가상 AC밀란 부임 후 소방수 역할을 수행하지도 못했다. 장점 없이 단점만 보이며,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리그가 중단됐던 시기 피올리는 철저하게 준비한다. 당시 가장 잘 나갔던 한지 플리크의 바이에른 뮌헨을 벤치마킹해서 팀을 꾸려나갔다. 선수들의 장단점을 제대로 파악하여 장점은 극대화하고 단점은 최대한 가리며 팀을 완전히 바꿨다. 재계약 조항에 있던 챔피언스리그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스스로 자기 능력을 보여주며, 재계약을 이뤄냈다.
2020-21 시즌, 8년 만의 챔피언스리그 진출과 리그 2위, 2021-22 시즌 11년 만의 세리에 A 우승, 2022-23 시즌 챔피언스리그 4강 진출이라는 기록을 보여줬다. 비록 이번 시즌은 리그 2위로 마무리했고, 전술에서 그에게 많은 비난을 하지만 시즌이 지날수록 나쁘지 않은 성적을 꾸준하게 만들어냈다. 즉, 성적은 최대한 낼 수 있는 감독이다.
피올리는 자신이 가보지 못한 길을 가면서 팀과 함께 성장했고 성적은 보장한 감독이다. 물론 축구에서 승리하기 위해 좋은 전술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전술이어도 온전히 수행할 수 있는 선수가 없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단순히 이름값이 있는 선수를 영입한다고 해서 그 전술에서 맡은 역할을 온전히 수행한다는 보장이 없다.
이번 시즌 밀란이 이와 같은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피올리의 전술에선 중원에서 케시에처럼 수비적인 역할이 가능한 선수가 필요했다. 그래서 중원 자원인 로프터스 치크, 레인더스, 무사를 영입하지만 누구도 중원에서 케시에만큼 역할을 잘 수행한 선수가 없다. 중원에서 볼 탈취에 실패하면 바로 수비진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다 보니 중원에서는 공수 방면에서 맞지 않은 역할을 할 수밖에 없고, 이 또한 중원 삭제 전술이라며, 조롱 섞인 말들을 한다. 물론 감독이라면 전술적으로 해결을 해야 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입하는 데 있어서 전술과 맞는 선수를 영입해야 한다는 바이다.
혹자는 '그를 보내고 다른 감독으로 대체하는 것이 낫다.' 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신빙성이 있는 말인지 전문가의 생각을 들을 필요가 있다.
축구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이자 AC밀란의 레전드 감독인 아리고 사키는 피올리에 관한 인터뷰에서 '그를 경질하면, 전술적으로 뛰어넘는 감독이 오지 않는 한 10년 전으로 돌아갈 것이다.'
"또한 그의 대체자로 로페테기, 콘세이상, 폰세카, 마르크 반 봄멜 등 많은 감독이 거론되지만, 그 누구도 피올리만큼 세리에에서의 경험도 없다. 우승을 원한다면 대체자로 언급되는 감독들보단 피올리 감독이 이끌어서 우승하는 것이 더 확률이 높다고 본다."라며 피올리에 관해 지지하는 것으로 입장을 표명하였다.
밀란이 우승을 했던 시즌을 되돌아보면, 피올리 감독 - 말디니 디렉터 - 엘리엇 구단주가 협력해 좋은 시너지 효과를 냈다. 하지만 말디니가 쫓겨난 현재는 그렇지 않다. 단순히 피올리만의 잘못으로만 보는 것이 옳을까? 대중은 피올리에게 너무 가혹한 평가를 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지난 다섯 시즌 동안 AC밀란을 이끌며 다시 스쿠데토를 가져온 피올리에게 행운이 깃들길 바란다는 말로 이 글을 마무리하겠다.